향촌동 시대. 르네상스와 피난 문인1991.12.1 대보백화점 화재2015.2 구 대보백화점돼지 고기 전문 식당의 경상 감영 공원 건너 편의 다이호 빌딩 1층 상가에 돼지 고기 전문 식당이 나란히 있다.선술집 골목답게 돼지 고기 삶은 고기, 돼지 국밥을 전문으로 취급하고 있다.상주 식당은 지금도 유명하고 가격도 싸다.빵 코리아의 손 인텍, 단이란 주군점 향촌동 번화가인 빵 코리아의 손 인텍.오후 3시경부터 중년층이 하나 둘 모여들고 1분에 한명꼴로 성인텍에 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특히 예쁘게 화장한 아줌마들.동백 기름을 바르고 흰 옷, 하얀 더블 정장, 중절모, 하얀 구두를 신은 전형적인 “폼 셍폼사”중년들이 성인텍 문화를 선도하고 있다.検出された言語がありません。
入力言語を確認してください。成人テック風の発源地「パンコリア」(嶺南日報2007.2.9)初のミーティング場所でお互いに気に入ればここに来る成人テック風の発源地.. 「がん宣告」を受けた郷村洞。ここでもピカピカの店がある。 それは「香村洞(ヒャンチョンドン)のソンインテック」だ。 シルバーたちの「ボンゲティング」がこれをさらに活性化させた。 ミーティング場所は慶尚監営公園、そこで会って気に入ったらここに来る。 香村洞(ヒャンチョンドン)のソンインテックブームの発源地はパンコリア。 70年代版コリアは「若者の日向」、しかし90年代後半からは「老人の日向」になってしまった。 パンコリアは日帝時代、花月ホテルの席。 大人のコーラテックはシルバーのためのお酒を売っていないキャバレーと理解すればいい。パンコリアの入り口。 路地はしょんぼりしているのに、音楽だけは意気揚々。 70年代に再公開された映画館で聞いたダッチナは、電子オルガンの音楽が漏れる。 2千ウォンの入場券を買って中に入った。 おばあさんは1千500ウォン。記者が若く見えたのか、支配人がちらりと見つめる。 午後1時30分、ホールの中には30組余りの50~60代が手を取り合って踊っている。 ダンスは溌剌としているが、彼らの厳しい表情までは隠すことができない。 旧式の照明灯がゆっくりと回っている。 女性客はおばあさんの声を聞くことを不快に思う。 そのためか、ファッションも果敢で、赤いルージュまで塗って、年齢よりずっと若く見える。 定年退職して行く所がない往年のダンサー、一人暮らしのシルバーが多く利用する。 以前のように軽快なジルバク(ジルバク)と柔らかなブルース音楽を交互に送ってくれる。 午後2時30分、この床ではかなり有名な歌手ユ·ソンイルタイムが始まった。 ホールがさらに熱くなる。 パンコリアがうまくいくと、旧コリアデパート5階、テボアパートとムグンファデパート建物の地下に多様な成人テックが建設される。 現在、香村洞に国際、大宝、ムグンファ、新世界、グランド、コリアなど10余りが密集していた。路地の旅館の郷村洞には大小の旅館が多いが、私たちが一般的に考える旅館とは多く異なる風景を見ることができるが、主に極貧者と貧しいおばあさんたち、都市の労働者たちが非常に安い価格で下宿をしている。향촌동 음악감상실, 녹향과 르네상스 녹향은 1946년 문을 열었으며 지금은 한국영상박물관 옆 2층에 있다. 르네상스는 현재 판코리아 주점 골목 안에 있는 세명칼국수집 위에 위치해 있다. 세명칼국수 뒷문과 빵코리아당랑주점과 연결되어 있다.르네상스 음악감상실60년부터 유명했던 고기야 “녹양”너구리, 녹양은 생고기라는 이름을 먼저 향촌동에 도입한 60년대부터 유명했던 고기 가게이지만, 아직 명맥을 잇고 있으며 중년의 데이트 족이 많이 찾는 코스다.향촌동의 초밥 대표점”콘도 씨의 집”옛날에는 유명했던 일본 음식을 조리장 권·심영수 씨(20년 전 사망)의 성을 일본식 발음으로 부르던 것이 지금도 불린다.할머니(이·울붕, 74)이 지금도 “할머니 집 식당”을 운영하고 있으며 주로 이마가~국, 스모ー노 요리 전문이다.※일본식 초절임 요리”자두(식초물)60년부터 유명했던 생고기집 ‘녹양’ 너구리, 녹양은 생고기라는 이름을 최초로 향촌동에 도입한 60년대부터 유명했던 생고기집이지만 아직 명맥을 이어가고 있어 중년 데이트족들이 많이 찾는 코스이다.향촌동의 스시 대표점 곤도씨의 집, 옛날에는 유명했던 일식 전문 주방장 권영수씨(20년 전 사망)의 성을 일본식 발음으로 부르던 것이 지금도 불리고 있다. 할머니(이을분74)가 지금도 할머니집 식당을 운영하고 있으며 주로 어묵탕, 스모노 요리 전문이다. ※ 일본식 초무침 요리 ‘자두(醋물)중앙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할머니들의 콘도 씨 집과 나카이 백화점 무영도 일제 시대 향촌동이 얼마나 유명했는지를 증언하고 준 중앙 시장 입구에 채소를 45년간 팔아 온 할머니.바로 건너 편에 나이가 85세 된 빈대떡을 35년간 구워서 판 할머니가 있지만 옛날 방식 그대로 빈대떡이어서 맛과 추억을 회상할 수 있겠다.핑데톡 1,000원, 부추 부침개 700원, 오징어 파전 1,000원 다방과 음악 감상실의 변천사(자료:2003년”대구는 살아 있다”대구 새집리지)일제 시대의 카노 카오리, 백조 피아 니스 토이·상궁 씨가 개장)50년대의 흰사슴, 호수, 청자, 하이마트 정치가인 김·윤 황 씨가 “. 광장에서 “이란 시를 탄생시킨 곳은 “카노 카오리”56년 김·스 역 씨가 대구 극장 건너 편에 “하이마트”오픈 60년의 검은 색 장미, 왕 중 황금의 심·빔·빔·송·빔·빔지.록향에서 시라토리-백조에서 흰사슴-호수 다방에 아지트가 변경됐다.김춘수(김·충수)나폴리, 몸파리방 장관동 창광동 무랑무즈에 출입했다.80년대 동아 양봉원 앞의 시인 다방에 젊은 문인들이 모였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다방과 음악 감상실의 쵸은기와 다방(정 웅소림 옆, 녹햐은(대구 극장 건너 편)멕햐은(병무청 입구)문학에서 본 약전 골목길과 햐은쵸은동대구 중구 장관동 일대 ‘마당 깊은 집’ 무대에는 소설 속 마당 깊은 집 벽화도 그려져 있다.그의 문학에서 가장 비중 있는 주제는 남북한 분단 문제였다.어린 시절 아버지는 월북, 그 때부터 닥친 인생의 역경은 형언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특히, 반공 이데올로기를 정권 차원에서 이용한 이승만 독재 시절부터 긴 군사 독재 시대를 거치는 동안 고생하며 살아온 그의 유년기와 청년기를,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그의 문학 작품에서 대구를 무대로 한 작품으로는 이· 선 문학 상을 수상했다”마음의 감옥”와 프랑스어로 번역되기도 하고 또 텔레비전 드라마화된 “정원의 깊은 집”이 있다.1988년 발표된 “정원의 깊은 집”의 배경은 대구시 중구 장관동의 고택이다.이 집은 바로 원 이일, 워터 누 세상을 떠난 원화도, 3형제들이 엄마와 함께 고생하고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었다.바로”정원의 깊은 집”이라는 김·원화 이일의 이 자서전적 소설에서 전쟁이 끝나고 피난민이 모여들던 시기의 그들의 처절한 인생을 그대로 복원했다.이 장관동 김·원화 이일이 살던 집은 옛 부자가 살던 지역이다.약전 골목의 일각에 있는 옛 제일 교회와 상서 여자상의 중간에 위치한 자형의 한옥 기와집이다.한국 전쟁이 끝나고 그의 아버지는 월북한 1954년 대구로 옮기면서 어머니와 3남자 1여자의 가족은 장관동 창광동 부근에서 여기저기 집에 임대하고 수에서 수없이 옮겨야 했다.월북한 아버지를 여읜 뒤 수레처럼 대구로 밀려나고 바느질을 하면서 어린 4형제를 키우는 어머니와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이다.당시 영남 일보 신문 배달 소년의 어린 눈으로 바라본 전후의 이 시대사를 가장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대구 구간과 대학 병원, 향촌동 뒷골목 등 이 소설의 무대는 바로 1950년대의 대구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그리고 이 대구는 김 전 하지메의 문학적 에너지를 충전시킨 현장이기도 하다.약령시와 뽕 나무의 골목길을 연결 진 골목( 긴 골목)는 아직 1950년대 시대사의 흔적이 조금씩 붙어 있다.(2002.9.2월 대구 문화의 이·상규)집마다 전세 난민들이 많지 않나!!!싸우면서 기댔으며, 전쟁 통의 여정(문화 일보 2016.1.15)대구 중구 남성로에 있는 소설 ‘마당 깊은 집’ 속 집터.다소 형태가 바뀌었지만 벽면에 옛집 형태를 그려놓아 작품이나 드라마를 본 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해준다. 이곳의 장관동 일대는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별다른 변화 없이 전쟁 직후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근대의 골목’으로 조성되어 추억의 명소로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検出された言語がありません。
入力言語を確認してください。キム·ウォンイルの小説「庭の深い家」の背景である大邱長官洞の6·25戦争が起きる前まで、私たちの家族はソウル南山の下の忠正路墨井洞で暮らした。 まず、上京した父親に呼ばれ、家族が故郷の慶尚南道金海郡進永邑を離れ、ソウルに上京してから2日目を迎えていた。 姉は小学校5年生、私は2年生だった。 ソウル生活もしばらく、戦争が起こると、私たち家族は北朝鮮の治下で3ヵ月間、墨井洞(ムクジョンドン)で経験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人工治下になると学校は生徒たちの登校を通知し、北から降りてきた女先生から人民抗争歌を学び、新しい国の新しい少年同志たちが守らなければならない社会規範を身につけた。 午前は勉強、午後は米軍爆撃でレンガの破片が散乱した横の掃除に動員された。 戦線で戦う軍人たちに慰問手紙を書き、慰問品を集めて送った。9月下旬、ソウル修復直前にソウル市党幹部だった父親が、家族の面倒を見ることができないまま単身で北朝鮮に渡った。 (父が家族を避難させに来る直前、南山を越えてきた米軍が私の家を先に襲ったので、私たちは急いで清凉里の方に避難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世の中には予期せぬ偶然が機会を与えてくれると、私たち家族は幸いにもそれで韓国の地に残ることになったのだ。その年の11月下旬、寒さが吹き荒れた季節の変わり目に、私たち家族は故郷の金海陣営に無事に降りてくることができた。 故郷の家まで売り払ってソウルに帰ったため、再び故郷の地を訪れたが、田畑一軒、住む家も残っていなかった。 両親にもジニョンは生まれたところではなかったため、頼れる親戚すらいなかった。 母親は故郷で暮らすことができないと、姉と弟を連れて母方の親戚が住んでいた大邱に出て敷地を決めた。 私だけが故郷に残されたままおばあさんと一緒に過ごした。 他人の家の隣の部屋に住んでいたおばあさんが叔母の家に入ってしまうと、私は遠い親戚にあたる市場街の蔚山の家の酒幕に不木ハニとして居候した。 てんとう虫として過ごした私のいたずらっ子生活も数年で終わった。小学校を卒業した1954年5月、私は大邱(テグ)に上京し、家族と一緒になった。 母親の厳しい統制の下で暮らすようになったのだ。 戦争で果樹の家になった母親は、大邱(テグ)の中心部である長官洞の門口に三つの部屋を借りて、針仕事で4人の子供を育てていた。長官洞一帯には食堂、料理屋、料亭が多く、当時の料亭は妓生を10人以上従えた家が多かった。 ソウルが修復されたが、官庁の一部だけが上京しただけで、2軍司令部と軍需物品を調達していた主要機関と織物工場、中小企業がそのまま大邱に残っていたため、戦争の景気が良かった。そのため、そのような上流層の顧客を相手にする妖精が多く、そこには一つの家に十数人ずつ妓生を置いていた。 妓生といっても飲み会の末に体を売る部類ではなく、戦争で家長を失い家族の生計のために仕事場に出た高学歴所有者も多かった。 香港製の絹で身を包み、酒の席に残ったが、品行が静粛で、母親に裁縫品を預けに来た彼らが世の中の困難について訴える言葉を私はよく盗み聞きしたりもした。母親は幼い頃、自分が学ぶことができなかった恨を巡り悲しんでいたため、飢え死にしないうちに子供たちは成長の真っ最中に必ず学ばなければならないとし、隣人たちがこの戦時に女の子までなぜ上級学校に行かせるのかと母親を詰問したが、姉をどうしても中学校に行かせた。 その年、小学校に入学した弟とその下で末っ子の弟は5歳だった。 そこに故郷から来た私まで一緒になって中学校に行か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ので、母親の背中が痛くなるほどだった。 家賃を払ったり、炭火を起こしてご飯を炊いたり、子供たちに学資金を貸したりしたため、このご飯一食を十分に食べることができず、おかずと言っても一つや二つが精一杯だった。 冬でも火を焚くことができず、冷たい状態で兄弟たちがお互いの体温で耐え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学校の始業期が終わり、あなたは来年になって中学校に入る。 だから、これまで社会経験も積んで、学資金にも足しげく新聞配達に乗り出してみなさい。 あなたは将来、父親のいないこの家を養う責任を負った長男だ。 わが家がどこの家門が豊かで、持っている財産があるのか、貧乏の身に避難した境遇ではないか。 だからあなたは早くから社会経験から着実に積んでおかなければならない。」母親の強い決断だった。私は最初は夕刊新聞販売をしていたが、大邱中心部中区三徳洞と東仁洞一帯に新聞配達をすることになった。 その時代、私が経験した初めての大邱生活のあれこれ体験談が小説「庭の深い家」を産んだ。 したがって、この小説は9割ほどが生々しい経験談である事実に基づいて使われ、残りの一部分だけが物語連結に必要で虚構に作られた。1954年当時、大邱中心部一帯はどの家も門屋や隣の部屋に避難民が1、2世帯ほど住んでいた。 彼らは何も持たずに故郷に背を向けたため、苦しい生活を送っていた。 休戦ライン以南から降りてきた避難民たちは故郷を訪ねて皆上がったが、以北から降りてきた難民たちは休戦になっても行く所がなかったため、大邱にそのまま座り込んで肉体労働をしたり、無駄に商売の仕事に出て虎口を延命していた。 俗称「ヤンキー市場」と呼ばれた駅前通り市場では、上の言葉を使う彼らが修繕した軍服を売って行商をした。「庭の深い家」の背景となった長官洞はヤンキー市場と道一つを挟んだ小さな町だった。 洞としては面積が狭く、世帯は300戸余りだった。 長官洞は60年が過ぎた今まで、特に変化なく戦争直後の昔の姿をそのまま保管しているのが不思議だ。 一字型瓦葺きの家とトタン屋(トタン屋)が狭い路地を間に挟んで混ざっているが、自動車が通えない狭い路地の南北に曲がりくねった場所を取っている。 今は韓屋の家を改修した韓定食飲食店が建てられ、路地のある部分は市から道を開けて大通りを出したりもしたが、概して60年が過ぎた今も長官洞は以前の姿が残っている。 それで最近大邱市が掲げたスローガンそのままに、「近代の路地」という言葉そのままに昔の姿をとどめたまま残っているのがむしろ「思い出の名所」になって観光客まで引き込んでいるのだ。6·25戦争直後の当時は、故郷に戻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避難民がヤンキー市場で座り込みを行い、商売をしながら長官洞一帯で側室暮らしをしていた。 彼らは避難民の身分のまま厳しい現実に苦しめられ、家族全員が蜂が戦線に出てあせあせあせあせ김원일의 소설 ‘마당 깊은 집’의 배경인 대구 장관동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우리 가족은 서울 남산 아래 충정로 묵정동에서 살았다. 먼저 상경한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가족들이 고향인 경상남도 김해군 진영읍을 떠나 서울로 상경한 지 이틀째를 맞고 있었다. 언니는 초등학교 5학년, 나는 2학년이었다. 서울 생활도 잠시, 전쟁이 터지자 우리 가족은 북한 치하에서 3개월간 묵정동에서 겪어야 했다. 인공 치하가 되자 학교는 학생들의 등교를 통보하고 북쪽에서 내려온 여선생으로부터 인민 항쟁가를 배워 새 나라의 새 소년 동지들이 지켜야 할 사회 규범을 익혔다. 오전에는 공부, 오후에는 미군 폭격으로 벽돌 파편이 흩어진 옆 청소에 동원됐다. 전선에서 싸우는 군인들에게 위문 편지를 쓰고 위문품을 모아 보냈다.9월 하순 서울 수복 직전 서울시당 간부였던 아버지가 가족을 돌보지 못한 채 홀로 월북했다. (아버지가 가족들을 대피시키러 오기 직전 남산을 넘어온 미군이 우리 집을 먼저 덮치자 우리는 서둘러 청량리 쪽으로 대피해야 했다.) 세상에는 예기치 못한 우연이 기회를 주자 우리 가족은 다행히도 그래서 한국 땅에 남게 된 것이다.그해 11월 하순 추위가 몰아친 환절기에 우리 가족은 고향 김해 진영으로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다. 고향집까지 다 팔고 서울로 돌아오는 바람에 다시 고향땅을 찾았지만 논밭 한 채, 살 집도 남아 있지 않았다. 부모님께도 진영이는 태어난 곳이 아니어서 기댈 수 있는 친척조차 없었다. 어머니는 고향에서 살 수 없자 언니와 동생을 데리고 외가 친척이 살던 대구로 나가 터를 잡았다. 나만 고향에 남겨진 채 할머니와 함께 지냈다. 남의 집 옆방에 살던 할머니가 고모집에 들어가 버리자 나는 먼 친척뻘 되는 시장가 울산집 주막에 불목하니로 얹혀살았다. 무당벌레로 지냈던 나의 장난꾸러기 생활도 몇 년 만에 끝났다.초등학교를 졸업한 1954년 5월 나는 대구로 올라와 가족과 함께했다. 어머니의 엄격한 통제 아래 살게 된 것이다. 전쟁으로 과수집이 된 어머니는 대구의 중심부인 장관동 문간에 방 세 개를 빌려 삯바느질로 네 아이를 키웠다.장관동 일대에는 식당, 요릿집, 요정이 많았고, 당시 요정은 기생을 10명 이상 거느린 집이 많았다. 서울이 수복되었지만 관청 일부만 상경했을 뿐 2군 사령부와 군수 물품을 조달하던 주요 기관과 직물 공장, 중소기업이 그대로 대구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전쟁 경기가 좋았다.그래서 그런 상류층 고객을 상대하는 요정들이 많았고, 그곳에는 한 집에 십여 명씩 기생을 두고 있었다. 기생이라고 해도 술자리 끝에 몸을 파는 부류가 아니었고, 전쟁으로 가장을 잃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터에 나선 고학력 소유자도 많았다. 홍콩제 비단으로 몸을 감싸고 술자리에 남았지만 품행이 정숙해 어머니께 바느질품을 맡기러 온 그들이 세상의 어려움에 대해 호소하는 말을 나는 자주 엿듣곤 했다.어머니는 어린 시절 자신이 배우지 못한 한을 두고 슬퍼했기 때문에 굶어 죽기 전에 아이들은 한창 성장할 때 꼭 배워야 한다며 이웃들이 이 전시에 여자아이까지 왜 상급학교에 보내느냐고 어머니를 힐문했지만 누나를 어떻게 해서든 중학교에 보냈다. 그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동생과 그 밑에서 막내 동생은 다섯 살이었다. 거기에 고향에서 온 나까지 합세해 중학교에 가야 했기 때문에 어머니의 등이 아플 정도였다. 집세를 내거나 숯불을 피워 밥을 짓고 아이들에게 학자금을 빌려주는 바람에 이 밥 한 끼를 제대로 먹지 못했고 반찬이라 해도 한두 가지가 고작이었다. 겨울에도 불을 피우지 못하고 차가운 상태에서 형제들이 서로의 체온으로 버텨야 했다.학교 개학기가 끝나고 너는 내년에야 중학교에 들어간다. 그러니 그동안 사회경험도 쌓고 학자금도 보태며 신문배달에 나서보라. 당신은 미래에 아버지가 없는 이 집을 부양할 책임을 진 장남이다. 우리 집안이 어느 가문이 넉넉하고 가진 재산이 있는지 가난의 몸으로 피신한 처지가 아닌가. 그러니 당신은 일찍부터 사회 경험부터 차근차근 쌓아둬야 한다.” 어머니의 강한 결단이었다.나는 처음에는 석간 신문 판매를 하다가 대구 중심부 중구 삼덕동과 동인동 일대에 신문 배달을 하게 되었다. 그 시절 내가 경험한 첫 대구 생활의 이모저모 체험담이 소설 ‘마당 깊은 집’을 낳았다. 따라서 이 소설은 90%가량이 생생한 경험담인 사실에 근거해 사용됐고, 나머지 일부분만 이야기 연결에 필요해 허구로 만들어졌다.1954년 당시 대구 중심부 일대는 어느 집이나 행랑채나 옆방에 피난민이 한두 가구 정도 살고 있었다. 이들은 가진 것 없이 고향을 등지는 바람에 힘겨운 삶을 살고 있었다. 휴전선 이남에서 내려온 피란민들은 고향을 찾아 모두 올랐으나 이북에서 내려온 피란민들은 휴전이 되어도 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대구에 그대로 주저앉아 막노동을 하거나 쓸데없이 장사 일에 나서 호구를 연명하고 있었다. 속칭 ‘양키장터’라 불리던 역전거리 장터에서는 윗말을 쓰는 이들이 수선한 군복을 팔고 행상을 했다.’마당 깊은 집’의 배경이 된 장관동은 양키시장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둔 작은 마을이었다. 동으로서는 면적이 좁아 가구는 300여 호였다. 장관동은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별 변화 없이 전쟁 직후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 신기하다. 일자형 기와집과 함석집이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섞여 있지만 자동차가 다닐 수 없는 좁은 골목의 남북으로 굽이굽이 자리를 잡고 있다. 지금은 한옥집을 개보수한 한정식 음식점이 들어서고 골목길이 있는 부분은 시에서 길을 터 큰길을 내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60년이 지난 지금도 장관동은 예전의 모습이 남아 있다. 그래서 최근 대구시가 내건 구호 그대로, ‘근대의 골목’이라는 말 그대로 옛 모습을 간직한 채 남아 있는 것이 오히려 ‘추억의 명소’가 되어 관광객들까지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6·25전쟁 직후 당시에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피난민들이 양키시장에서 농성을 벌이고 장사를 하면서 장관동 일대에서 후궁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피난민의 신분 그대로 어려운 현실에 시달려 온 가족이 벌들이 전선에 나와 초조해 하고 있다